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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몽양(夢陽)이다. 그는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이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특히 조부 여규신(呂圭信)과 종조부 여규덕(呂圭德)은 동학에 가담했는데 어린 시절 몽양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 하지만 부친 여정현(呂鼎鉉)은 조부와 달리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계급주의를 신봉했으며, 몽양은 이러한 부친을 자신의 성장기에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회고했다.

정리 편집실 자료•사진 협조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자료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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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5년경 안창호, 조만식 선생과 함께. (좌_몽양, 가운데_도산, 우_고당)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3.1운동을 기획한 선구적 실천가
몽양 여운형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가면서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기독교를 접했고, 흥화학교(興化學校)를 거쳐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전신(電信)기술을 공부해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통신원이 일본 소유로 넘어가자 취업을 거부했고,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이후 그는 1919년 2월 초 비밀임무를 띤 몇 명의 청년들과 중국 상하이를 떠나 조선 각 처(경성, 평양 등)와 도쿄로 향한다. 이들의 임무는 조선의 민족인사들과 도쿄의 조선 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독립 청원을 위해 김규식을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궐기운동을 도쿄에서 2월 초에, 조선에서는 3월 초에 실행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 노력으로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한다. 2.8독립선언서는 국내에서 궐기를 준비 중이었던 민족인사들에게 전해지고, 2.8독립선언 때 모인 도쿄 유학생 600명 가운데 359명이 조선으로 들어와 이후 벌어질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다. 드디어 3월 1일 경성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1년여에 걸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으로 시작한다. 대한민국 건국이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 3.1운동을 촉발시킨 청년들, 그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당원이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선언 이후 전개된 해방의 세계 흐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고자 중국 상하이에서 만든 당이다.

이 당의 대표이자 청년들의 리더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이를 뒷받침할 거족적인 궐기를 기획한 사람이 바로, 몽양 여운형(呂運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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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36년 5월 18일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일제를 제압한 정의의 웅변가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그 배후 핵심인물인 몽양을 같은 해 11월 도쿄로 불러들인다. 회유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34세의 몽양은 논리적이고 당당하게 일본의 고관대작들을 오히려 주눅들게 했다. 식민지 정책을 책임졌던 고가(古賀) 척식국 장관은 몽양과의 회담 뒤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의지에 나는 동의한다. 내가 만일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그대와 같이 했을 것이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선총독부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나의 계책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대에게 높은 경의를 품고 있다.” 동경제대 요시노 교수는 “여 씨의 말에는 확실히 한가지 범하지 못할 정의의 섬광이 있다. (중략) 중국, 조선, 대만 등 많은 사람과 회담했으나 교양 있는 존경할 만한 인격으로서 여운형 씨는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단언한다.”라며 몽양을 격찬했다.

1919년 11월 27일 오후 3시 도쿄제국호텔, 조선 독립이 당위성을 밝힌 몽양 여운형의 웅변을 듣고 감동한 일본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다. 이 웅변에 감명 받은 일본의 좌익 지도자들은 몽양을 환영하는 만찬을 열었으며, 이들은 몽양의 연설을 듣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조선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빛나는 성과로 평가받는 몽양의 일본 방문 독립 선전 활동! 조선의 독립을 일제의 수도에서 당당하게 외친 몽양의 사자후는 일본인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고, 몽양을 회유하려다가 자신들의 수도를 조선 독립의 선전당으로 만들어준 꼴이 된 일본 정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제국의 콧대를 꺽어 버린 조선의 청년,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 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했나 임시정부의 지사들과 대립하면서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세력과 정치투쟁 내분에 휩싸였다. 이후 그는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했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했다. 이후 몽양 여운형은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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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
4. 아래)1947년 7월 19일 몽양 선생 피격 지점.

여운형 독립운동가
출생•사망1886.5.25 ~ 1947.7.19
수 상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경 력1947 근로인민당 조직
1946~1947 제11대 조선체육회 회장
1946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
1945 조선인민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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